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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주 어진 박물관(御眞 博物館)내가쓴 글 2012. 2. 24. 10:28
어진박물관(御眞 博物館)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경기전 경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유한 박물관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태조에서 철종대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어진 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국가에서 공인한 표준영정이다.
고종과 순종 어진은 사진을 보고 모사한 것이다.
태조어진(太祖御眞, 1397~1398, 보물 제931호)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의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세종어진(世宗御眞, 1418~1450)
세종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 툐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세종어진은 김영철화백이 표준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군주이다. 성군으로 칭손되는 세종은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순종어진(純宗御眞, 1907~1910)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순종어진이다.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이다.
장복(곤복)은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황제는 십이장복, 왕은 구장복이다.
심이장복이란 명칭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순종 장례날인 6월 10일을 기해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어진(高宗御眞, 1863~1907)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고종어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전의 조선왕들과 달리 황제복인 황룡포 차림이다.
신정왕후(조대비)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고종황제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폐위되었다. 1919년 승하하였으며, 고종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영조어진(英祖御眞 재위 1724~1776)
영조어진 진본은 1900년(광무 4) 조석진 채용신등이 그린 반신상으로 1744년 영조 51세 때
사대부 화가 조영석 등이 그린 어진을 모사한 것이다. 여기 어진실의 영조어진은
1900년의 반신상 어진은 김영철화백이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1900녕의 영조어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조는 31세에 왕위에 83세까지 장수한 최장수 왕이며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왕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전개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뒤에 위치한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한 것이다.
철종어진(哲宗御眞, 재위 1850~1863, 보물 제1942호)
철종어진 진본은 1861년(철종 12)이한철, 조중묵 등이 그린 것이다. 융복(군복) 차림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어진이며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다.
불이 나 오른쪽 화폭의 1/3쯤 소실되었지만 여기 어진실의 철종어진은 복원된 어진을 촬영한 사진이다.
불에 탄 1861년의 철종어진(보물 제1942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현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정조어진(正祖御眞, 1776~1800)
정조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정조어진은 이길범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여기 어진실의 정조어진은 표준영정을 촬영한 사진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탕평정치를 전개해 붕당의 폐단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포부를 갖고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경기전 연표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조선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다.
경기전 건립과 중건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전주의 전각을 경기전이라고 칭한 것은 1442년(세종 24)이다.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소실되어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경기전 건축구조와 각 건물기능
경기전 관리
오정흥을 경기전 참봉에 임명하는 문서
뚜껑단지(고려, 전주국립박물관)
황백색 경질로 뚜껑이 덮힌 채 경기전 서편에서 출토되었다.
땅의 기운을 누르고 건물의 안녕을 비는 진단구로 추정된다.
용문암막새(조선, 전주대학교박물관)
경기전 서편 발굴과정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와당과 함께 3개인 와당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시영을 경기전 시위유사에 임명한 문서
경기전관이 이시영을 직역에서 제외시키라고 지시한 문서
제향사무 일지
경기전 중앙대제
태조어진 봉안과 의장물
태조어진은 일월오봉도 앞에 봉안하여 항상 펼쳐두고 감지 않았다.
어진 아래에는 좁고 긴 용상과 석제용두를 배치하였다.
어진을 모신 감실(침실) 안에는 또 진홍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든 작은 향주머니 4개,
진홍색 비단으로 만든 큰 향주머니 2개를 걸었으며 좌우에는 흰색 명주 수건을 각각 1개씩 두었다.
정전 내 좌우편에는 용선과 봉선, 홍개와 청개, 일산과 양산을 두며, 운검 1쌍을 정전 안 정문에 세워 두었다.
조경묘와 조경단
조경묘(肇慶廟)에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왕실의 시조 사당으로
1771년(영조 47)에 경기전 뒤에 건립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 없었다.
조경단(肇慶檀)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소로 건지산에 있다. 1899년(광무 3) 이한의 묘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하였으며, 고종이 친히 「대한조경단(大韓肇慶檀)」라고 쓴 비를 세웠다.
오목대와 이목대
오목대(梧木臺)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귀경길에 전주에 들러 일가친지를
불러모아 잔치를 벌이고 '대풍가'를 읊었다는 곳이다. 이를 기념해 태조고환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필遺址)라는 친필의 비를 1900년(광무 4)에 세웠다.
이목대(梨木臺)는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 친필의 비를 1900년(광무 4)에 세웠다.
목조 이안사에 관한 호운석, 장군수 이야기가 전한다.
『조경단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
류관현을 조경묘 참봉에 임명한 문서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사고
-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실록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물어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1439년(세종 21)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실록을 숭의사, 진남루 등에 보관하다가
1473년(성종 4)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여기에 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 선비 손홍록과 안의를 비롯한
지역민들이 태조어진과 함께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수호하였다.
내장산에서 1년간 지켜진 실록은 이후 아산, 해주, 강화도 등을 거쳐 1597년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그리하여 전주사고본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의 실록은 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전주는 역사지킴이의 고장이다.
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다시 출판하여 조선후기
5대사고(춘추관, 정족산사고,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에 봉안하였다.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후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보관하였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대왕실록
풍남문과 풍패관(전주객사)
조선시대에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響)이라고 하였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건립한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유래하였다.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은 전주부성의 남문으로 1769년(영조 43)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축조하였다.
이 때 '풍패'의 '풍'자를 따서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하였다. 서문은 '풍패'의 '패'자를 따서 패서문이라고 하였다.
전주객사(보물 제583호)는 풍패관이라고 하였다. 객사 중앙에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썼다고 전해진다. 글자 한자의 세로 길이가 1.79m, 4자를 합친 가로 길이가 4.6m에 이른다.
어진 봉안 가마와 의장물
어진을 이안하거나 환안할 때 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마들이 동원되었다.
현재 경기전에는 1872년 어진을 전주로 모셔올 때 쓰였던 신연 2점,
향정자 2점, 채여 1점, 가교 1점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 용선, 봉선, 청개, 홍개, 일산, 양산 등도 있다.
태조 어진이 유일 하듯이, 어진 이안 때 사용된 신연을 비롯한 의장물들도 유일한 것들이다.
따라서 태조어진과 경기전처럼 의장물들도 잘 보존되어야 할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향정(香亭)
향로나 향합을 옮길 때 사용하던 가마
신연 (神輦)
어진 위폐 등을 이안 및 봉안할 때 사용하던 가마
채여(彩與)
왕실 의식 때 귀중품을 옮길 때 사용하던 가마
2010년에 세운 어진박물관은 전주 경기전에 보관 중인 태조 어진을
전주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꾸며졌다.
지상 1층은 태조어진과 새로 모사한 6분의 어진(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 1층은가마실과 역사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872년 태조어진 봉안행렬을 닥종이 인형으로 제작한 반차도가 눈길을 끌었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메모 :'내가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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