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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의 능 홍릉 . 유릉
    펌 글 2012. 2. 24. 10:16

     

    홍릉 . 유릉(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릉 . 유릉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제 26대 왕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묘소인 홍릉과 고종의 아들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厚 尹氏)등 세사람을 합장한 유릉을 일컫는 말이다.

     

     

    왼쪽으로 가면 홍릉, 오른족으로 가면 유릉이 나오는데

    먼저 홍릉 쪽으로 걸어가니 재실이  눈앞에 보이고 우측으로 홍릉이 자리하고 있다.

     

     

     

     

    홍릉(洪陵)

    조선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로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익종추존 문조()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나이에 즉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고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76),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는 등 대외정책을 펼쳤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혁명(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등

     근대 한국의 주요사건을 겪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일협약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그 해 7월 퇴위했으며,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승하했다.

    일제에 의한 고종의 독살설이 나돌아 고종의 국장일에 맞추어 전국에 3.1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고종 친정 이후 조선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세력을 추방하려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에 의해 1895년 시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왕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침전으로 가는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있다.

     

     

    침전 안의 모습

     

     

    침전에서 바라본 홍릉의 모습

     

     

    침전(寢殿)

    이 건물은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휴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의 문무석이 서있다.

    그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홍릉의 석물이 양옆으로 배치된 모습

     

     

    홍릉은 다른 능과는 다르게 석상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며 웅장하다.

    그리고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을 능침에 세우지 않고 침전 앞에 배치한 것이 다른능과  다르며

    홍릉의 문인석은 역대 왕릉의 문인석 중에서  키가(3.85m) 가장 크다.

     

     

    홍릉 비각 안에 세워진 신도비

     

     

    침전에서 능침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우측으로 올라가서 카메라를 최대한 당겨본 모습이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 그 양 옆으로 망ㅈ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무덤 우측 앞쪽으로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멀리서 바라본 홍릉의 전경

     

     

    홍릉 입구에 있는  어재실의 전경

     

     

       

     

    어재실(御齋室)

    이곳은 고종황제의 능에 딸린 재실로  제관들의 제사준비와 휴식을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파견되어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모든제도를 혁신함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바뀌었고 재실건축도 바뀌었다.

    따라서 이 어재실은 역대의 능과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고급 살림집형의 재실은 행랑채와 그 밖의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일반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실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모습이다.

     

     

     고종은 매년 1월 21일(양력), 명성황후는 매년 10월 8일(양력) 제향한다.

     

     

    재실 오른쪽 앞에 수라간이 자리하고

     

     

    왼쪽 앞에는 수복방이 자리하고 있다.

     

     

    홍릉으로 가는  길에는 천원지방(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고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연못이 아닌 가운데 둥그런 섬을 두고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인 원지원도 형식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홍릉 앞에서 앞을 바라보면 쭉쭉 뻗은  나무사이로  연못이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 길로 조금만 가면 유릉이 나온다.

     

     

     

     

    유릉(裕陵)

    조선 왕조  27대 순종과 원후 순명황후, 계후 순정황후의 능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광무 1)년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재위 4년만인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1926년 4월 25일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순종 국장일에 맞추어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 19년(1882)에 세자비가 되었고,

    광무 원년 (1897)에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 광무 8년(1904) 11월에 33세로 

    승하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모셨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천장하여 함께 모셨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고종 광무(1906)에

    왕태자비가  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순종의 계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겪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가

    순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고  1966년 73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왕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영친왕은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로 운명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 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았으려 조약체결을 서두르자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다가 결국 숙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릉의 석물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홍릉 . 유릉은 기존 조선왕릉과 석물의 위치와 종류,  숫자가 다르고

    정자각 대신 일자각 침전이 자리하고 있다.

     

     

    유릉 비각

     

     

    유릉 신도비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유릉은 한 능침에 세명을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로 조영되어 있다.

     

     

    유릉 침전에서 앞을 바라본 모습

     

     

    유릉은 어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예감(망료위(望燎位))

    능에서 임금이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던 곳

     

     

    산신석(山神石)

    묘제를 지내기 앞서 산신령에게 제사를 먼저 지내기 위해 설치하는 판석

     

     

    유릉 앞쪽에는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홍릉과 마찬가지로 재실의 규모도 크고 잘 보존되어있다.

     

     

    재실 안 모습

     

     

    밖에서 바라본 재실의 모습

     

     

     

     

    유릉은  매년 4월 25일(양력)에 제향하고 있다.

     

     

    유릉 능역내에는 두기의 어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중 금천 주변의 어정은 이렇게  둘레석만 남아 있다.

     

     

    입구에  홍릉 . 유릉  역사문화관이 있으니 둘러보면 좋다.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
    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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