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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강성서원
    잡동사니창고 2007. 7. 29. 16:14
    이 름 강성서원(江城書院)
    종 류 문

    화재자료 제70호
    시 대 조 선 시 대
    소재지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 665
    규 모 1 곽(11,610㎡)
    재 료
    지정년월일 1984년 2월 29일
    소유자 남평문씨



    이 서원은 삼우당(三友堂) 문익점(文益漸)과 풍암 문위세(文緯世)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옛 이름은 월천사(月川祠)였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 월천사를 세운 것에서 비롯된다. 숙종 28년(1702) 사우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였고 영조 10년(1734)에는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케 되었다. 정조 9년(1785)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 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리게 되자 이에 조정으로부터「강성」이라는 액호(額號)를 받았다.
    그 후 고종 5년(1868) 훼철되어 고종 31년(1894) 후손 문정원・문욱호 등에 의해 설단하였다가 1905년에 강당을 중수 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신실(숭덕사)를 중건하였다.
    문익점(1329~1398년)은 진주 강성현 출신으로 자를 일신(日新), 호를 삼우당(三友堂)이라 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들어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옮으로써 우리나라의 의생활(衣生活)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공은 고려 우왕 1년(1375)전의주부, 고려 공양왕 1년(1389)좌사의대부가 되었
    고,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세조때 사당이 세워졌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였다.
    문위세(1534~1600년)는 문익점의 9대 손으로 자는 숙장(叔章) 풍암(楓庵)이다. 명종 22년(1567)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보다는 오직 학문 연구에만 전심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선조 28년(1595) 용담현령에 임명되었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러 선조 33년(1600)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사당(祠堂)인 숭덕사(崇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였다. 양박공면에는 바람막이판을 설치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가구는 1고주 5량가이다. 강당(講堂)은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내・외삼문을 갖추고 있다.
    출처 : 장흥 화이팅!!
    글쓴이 : 남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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