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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운현궁 왕실문화를 거닐다아름다운 사진보기 2012. 2. 29. 16:10
안국역 3번 출구로 나가면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이 나오고
그 옆에 운현궁 담이 있다.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의 담과 운현궁이 붙어 있다.
운현궁 앞길에서 본 운현궁은 화려하지 않고 웅장한 양반집의 느낌이다.
이제 운현궁으로 들어가 여기 저기 살펴 보기로 한다.
운현궁 (사적 제257호 )
조선26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고종이 탄생하고 즉위하기전 12세까지 자란곳이다.
운현궁이란 서운관이 있던 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불렀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쳐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궁에서 관리와 경비가 파견되는 등 거주 인원이 많았다.
운현궁 안에는 우물이 많았는데 그때 궁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수 있다.
수직사 경비나 관리자의 물품을 재현해 놓았다.
수직사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순서대로 보인다.
노안당에서 바라 본 정문의 모습이다.
문 옆으로는 기획전시실이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노안당이 나오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노락당이 나오는데
노안당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1864년(고종1) 지었으며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 '노자를 안지(安之)하며' 라고 한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이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갖고 있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방안에는 그때의 물건인듯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 대원군이 사용하였다.
주로 나라의 주요정책들을 논의 하였으며
청나라로 갈때 이곳에서 납치되어 환국한 후 집권과
하야를 반복할때도 이곳에서 정치와 유배되다시피 은둔 생활을 하였다.
노안당 옆에는 천하장안이 기거하였던 건물이 있다.
천하장안은 비밀정보원으로 흥선대원군의 방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명을 받았다.
노안당 후경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이곳 안쪽에 있는 속방에서 흥선대원군이 79세에
돌아가신 곳이 어디쯤일까 상상해 보았다.
이제 노락당으로 들어가 보도록 한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1866년(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노락당은(고종1)에 지었으며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에게 노락당기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당시의 흥선 대원군의 권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912년에는 양관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는데 그곳은 저기 보이는
덕성여대 소유가 되어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이로당 들어가는 입구
이제 노안당과 통하는 이로당 쪽문으로 가 보기로 한다.
이로당에는 어린이들의 체험행사로 아이들 신발이 많았는데
마루에 앉아 이로당의 여자가 되어 마당을 둘러 보았다.
이로당은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고종6)에 새로운 안채로 지었다.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하여 금남지역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음(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로당은 별당으로 쓰였으며 금남의 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건물의 튓마루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모두 이어져 있다.
이곳으로 나가면 이로당 후경이 나온다.
이로당 후경에는 우물도 있고 절구가 있다.
이로당 후경의 귀퉁이에 비석이 있어서 가 보았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올라가 놀았다는 소나무를 기념하여 세운 경송비가 있다
그러나 그 소나무는 세월의 무상함에 보이지 않았다.
이로당 후경에는 난을 올려놓고 난을 즐겼다는 무승대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모든 건물이 다 통하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고 후경으로 돌아서
처음에 들어 갔던 노안당으로 갈수 있도록 빙빙 돌게 되어 있다.
노안당 후경의 출입문
이로당으로 들어가는 문
운현궁의 담의 문양 자세히 보면 다 이어져 있다.
운현궁은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때 사대부집보다 궁궐 내전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이재면을 거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집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덕성여대로 들어 가려고 하자 경비 아저씨가 못들어 가게 한다.
그래서 덕성여대 쪽으로 이어진 운현궁 담을 따라가 본다.
덕성여대 대문도 운현궁 대문과 닮아 있었으며
덕성여대 주차장에 있는 쪽문도 운현궁의 쪽문인듯 했다.
고종이 등극한 후 흥선대원군은 운현궁 터를 확장하여 그 범위가
덕성여대, 구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까지였고
지금은 한개지만 그 당시에 대문이 4개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운현궁을 관람하고 안국역 지하철역으로 가는 중에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서울은 곳곳에 작품을 감상할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메모 :'아름다운 사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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