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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가지산 보림사
    펌 글 2010. 5. 23. 21:45

    가지산 보림사

     

    Ⅰ. 보림사의 역사

    1. 寶林寺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기슭에 있다. 절은 나지막한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산봉우리들이 마치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다. 절은 연꽃의 씨방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2. 하바드대학교 연경도서관에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세조 3년(1457)년에서 1464년 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와 관련되는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책에 보림사 창건설화가 있다.

     

    신라의 승려 원표대덕이 인도에 있는 보림사를 거쳐 중국 보림사에서 참선하던 중 한반도에 瑞氣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仙娥(선녀)가 나타나 자기가 살고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든다고 호소해왔다. 그래서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는데, 오직 백룡만 끈질기게 버티었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마침내 백룡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용 꼬리에 맞아 패인 자리가 용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 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口傳 창건설화도 있다.

     

    보조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나라 안 곳곳을 살피던 중 가지산에 와 보니 절터로는 좋은데, 큰 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었다. 보조선사는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숱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흙짐과 숱짐을 짊어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못은 메워졌다. 보조선사는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

    쫓겨난 두 용이 하늘에 오르려고 서로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여 용소가 생겼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 지금 보림사 남쪽에 있는 피재가 바로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진 곳이고, 장평면 청룡리는 청룡이 죽은 곳이라 한다. 피재 뒤편에는 용두산이 있고, 보림사 아랫마을 용문리에는 용소가 있고, 용문리 옆에는 늑룡리가 있는 등 부근에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용을 쫓아내고 절을 지었다는 사찰 창건설화는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양산 통도사에 지금도 구룡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구룡지는 통도사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자장율사가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알, 붓다의 머리뼈와 손가락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며 이르기를 “그대 나라 남쪽 취서산 기슭에 毒龍이 살고 있는 못이 있는데, 이 못된 용들이 비바람을 일으키고 곡식을 상하게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대가 용이 사는 연못에 金剛戒壇을 쌓고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三災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불법이 전하리라” 하였다. 그후 자장율사가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가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았다고 한다.

     

     

     

    3. 보림사를 창건한 이는 元表대사이다. <보조선사 창성탑비>에 의하면 원표대사는 당나라 天寶연간(742~756)에 당나라를 거쳐 인도에 가서 불교 성지를 순례한 후 돌아와서 경덕왕 18년(759)에 迦智山寺를 지었다고 전한다. 원표는 원래 화엄종의 승려여서 화엄종 절로 출발했다. 원표는 법력으로 경덕왕의 政事에 도움을 주었으며, 경덕왕은 이에 보답하여 왕 18년(759)에는 “왕이 특별히 명하여 長生標柱를 세우게 했는데 그 표주가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헌안왕 4년(860년) 普照禪師 體澄(804~880)이 이곳으로 온다. 곧 보조선사의 재가 제자인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사재를 털어 무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위를 조성하여 이 가지산사를 장엄하려 하자 국왕은 望水里 南等宅에 교지를 내려 금 1백십 分을 공출하게 하고 租 2천 斛(10말)을 내려 이를 돕게 했다. 다음해인 경문왕 원년(861)에는 널리 시주를 받아 절을 넓히는 불사를 일으켜 중창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가지산문의 종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보조선사는 초조 도의선사와 제2조 염거화상으로 전해오는 자가의 선문종지를 펴며 가지산문의 기치를 뚜렷이 세웠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858년에 불상 조성 허가를 얻는다. 그렇다면 체징이 이곳에 온 것은 858년이거나 그 이전이라야 한다.

    헌강왕 6년(880) 체징이 입적할 때에는 800여 명의 제자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5. 884년 헌강왕은 寶林寺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대사 慧能(638~713)이 주석하던 韶州 조계산 보림사의 이름을 이곳에 내려주어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한 것이다. 보림사란 절은 인도에도 있는데, 우리나라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이라 한다.

     

    6. 조선 태종 7년(1407) 조계종의 資福寺刹로 지정되었으며 이때는 가지사라 했다.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이 존재한다고 했으나, 정조 23년(1799)에 신경준이 편찬한 <梵宇攷>에는 폐사되었다고 했다. 그뒤 중창과 중수를 거쳐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20여 동의 건물을 갖춘 큰 절이었다.

     

    7. 1950년 가을 공산군 유격대가 이 절에 모여 겨울을 지냈는데, 이듬해 봄 군경 토벌대들이 와서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방화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전남 지역 8개 郡 공비 680명이 1950년 늦가을 모두 가지산으로 집결하여 보림사에서 한겨울을 보냈다. 다음해 3월 11일 오전 군경이 밀려오자 보림사를 떠나면서 불을 지르고 갔다고도 한다.

    절이 폐허가 되자 인근 주민들이 빈 절터에 집을 짓고 들어와 살아서 한때는 폐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일주문 밖의 민가들은 그때 생긴 것이라 한다.

     

    8. 1968년 대적광전이 복원되었고, 근래에 복원된 대웅전 등이 현재의 모습이다.

     

    Ⅱ. 보림사의 문화재

    1. 일주문은 포작을 여러 겹 중첩시켜 처마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방에는 활주로 받쳤다. 앞에는 “迦智山寶林寺”라는 현판 글씨가 두 줄로 세로 쓰여있다. 일주문 안 북쪽 창방에는 禪宗大伽藍이라 쓴 가로 현판이 걸려있다. 끝에 잔 글씨로 “順治 14년(효종 8년, 1657) 8일 예조, 守禦廳 兩司帖額, 擁正 4년(영조 2년, 1726) 3월 일 시행”이라 씌어있다. 효종 8년에 국가 수호사찰이 되었고, 영조 2년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는 뜻이다. 현판 아래에는 外護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은 공포가 중첩하여 매우 화려한 것으로 보아 현판이 쓰여진 영조 2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2. 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집으로 조선 중종 34년(1539)에 처음 지어졌고, 현종 9년(1668)과 정조 1년(1777)에 각각 중수하였다.

    문 안에는 대형 목조사천왕상 4구와 소형 금강역사상 2구가 각각 좌우에 나누어 서있고 가운데 칸은 통로로 쓰고있다.

     

    * 목조 사천왕상(보물 제1254호)은 천왕문에 걸린 목판 기록과 <보림사중창기>에 따르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된 것으로 조일전쟁 이전에 조성된 유일한 것이다. 이는 조선 목조 사천왕상으로는 가장 빠른 시기 조성된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중수하였다. 그뒤 사천왕상들은 팔이 떨어지는 등 훼손이 심했는데, 근래에 복원하였다. 1997년 6월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적광전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 북방 다문천왕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대체로 마귀를 밟고 서있는데 이곳에는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1995년 2월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등에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희귀본을 포함하여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는 조일전쟁 이전에 간행된 언해본도 많이 나왔다. 실제로 보림사에서는 선조 14년(1581) <묘법연화경>을 개판한 적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목조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세조 때까지 올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절 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 안에 들어가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3.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종루, 왼편에 동서 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 용마루에는 구름무늬 장식이 한 줄 있고, 그 위에 용의 몸통 모양을 한 기와가 죽 얹혀있는데, 양 끝에 용머리가 달려있다. 용마루 한가운데는 탑의 복발과 보주 모양과 비슷한 장식물이 있다.

     

     

    ※ 금산사 대장전 지붕 용마루에 복발형 절병통이 놓여있다. 대장전은 예전에 삼층목탑이었는데, 이것을 옮기면서 현재와 같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대장전 평면이 장방형인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대장전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용마루의 복발은 삼층목탑이 없어지면서 남은 흔적을 옮겨온 듯하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에 도깨비 얼굴 모양의 독특한 기와가 있다. 그 기와 위에 우진각 지붕집이 올라있고, 다시 그 위에 보주가 얹혀있다. 이에 대해서 도깨비는 중국 남방불교에 나타나는 것으로 남전 불교의 증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보주는 간다라 스투파의 상륜을 닮았다고 한다.

     

    *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

    대적광전 안에 있는 이 불상은 가지산문 종찰 보림사의 주불이다. 한국전쟁 때 대적광전이 불탔으나 이 불상만은 무사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원래의 자리인 것 같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만 남아 있다.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어서 9C 이래 지방 선종 사찰에서 조성한 비로자나불상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기준작품이며, 신라 하대에 많이 만들어진 철조불상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높이는 273.5cm이다. 흙으로 만든 나발을 덧붙여 놓았기 때문에 육계가 몸집에 비해 유난히 크다. 육계와 머리의 접합점에 있는 髻珠(구슬장식) 역시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흙으로 덧붙인 것이다. 얼굴은 조금 긴 계란형에 약간 살이 찐 편이다. 눈은 반쯤 뜬 모습으로 가늘고 날카롭다. 8C 불상에 나타나는 날카로운 콧등은 평면으로 되어 편편한 모양이며, 코끝에서 시작한 인중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두드러진 채 입술로 연결된다. 입은 크고 입술은 두텁다. 귀는 크고 길어 어깨에 닿을 만큼 축 늘어져 있다.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건장하고 당당하여, 원만구족한 불성을 표현한 이전 시기의 불상과는 달리 좀더 현실적인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러나 다소 관념화되었으며 불상의 정신미가 없어졌다.

    어깨는 움츠러진 것처럼 표현되었다. 긴 허리에 가부좌를 튼 무릎의 폭이 넓어 어깨가 더욱 좁아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에서 오른손은 위, 왼손은 아래로 포갠 지권인을 짓고 있으며 손은 체구와는 달리 작고 예쁘장하다. 어깨로 흘러내린 통견의 법의는 명치께서 모아진 후 팔을 거쳐 무릎까지 감싸고 있다. 가슴에 옷주름이 자유롭게 잡혀 있는데, 이것은 통견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의 옷깃은 세 가닥 주름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쯤 한번 뒤집혀졌다. 그래서 가슴은 V자로 넓게 터져 있다. 승각기(속옷)는 젖꼭지 바로 윗부분에서 약간 弧線을 이루는 평행선으로 되어 있는데, 속에 주름이 세 가닥으로 표현되어 있다. 흔히 승각기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치는 것이 원칙인데 특이하게도 평행선으로 처리되었다. 옷주름 표현은 전반적으로 유려한 곡선임에도 불구하고 탄력이나 긴장감 없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8C 불상에 비해 사실성이 떨어지고 추상화되었으며, 863년에 조성된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이나 867년경에 조성된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5호)과 달리 지방화된 모습을 보인다.

     

     

     

    ※ 이 불상의 제작 연대와 제작자

    명문은 불상 등허리 왼쪽 어깨에서 팔에 걸쳐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모두 8줄이며 한 줄에 10자씩 새겨져 있다. 불신에 조성 연대를 알리는 명문이 있는 예는 이 불상뿐이다. 내용은 헌안왕 2년(858) 7월 17일에 武珍州 長沙縣(지금의 광주 장흥군) 부관인 金遂宗이 왕에게 불상을 조성할 것을 주청하여, 8월 22일 헌안왕의 허락을 받고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명문에 “情王 卽位第三年”이라는 말이 있는데, 헌안왕 2년은 즉위년으로 치면 3년째가 된다.

    그런데 <보조선사창성탑비문>에는 “宣宗(846~859) 14년(헌안왕 4년, 860) 仲春에 長沙副守 金彦卿은 보조선사에게 제자의 예를 드렸으므로 입실의 빈객이 되었는데, 깨끗한 봉급을 모은 사재로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위를 조성하여 이 가지산사를 장엄하려 하자 국왕은 望水里 南等宅에 교지를 내려 금 1백십 分을 공출하게 하고 租 2천 斛(10말)을 내려 이를 돕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수종은 김언경과 같은 인물이다. 명문에는 조성한 날짜가 기록되지 않고 김수종이 임금에게 주청한 날짜(857년 7월 17일)와 왕이 허락한 날짜(8월 22일)만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宣帝 14년” 곧 860년에 중춘에 불상을 만든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그 14년은 당나라 선종이 즉위한 해(846)로부터 치면 그가 돌아간 859년이 된다. 그러므로 859년 봄에 이 불상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857년 8월 22일부터 철을 준비하고 匠人을 청하는 등 그 기초를 다져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면 이듬해 봄인 859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견해도 있다. 최완수의 <명찰순례> 2권, “가지산 보림사” 208쪽에 있는 내용은 이렇다.

     

    “불상 팔꿈치에 있는 양각 명문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양각 명문은 후일 조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보조선사창성탑비문은 보조선사의 보림사 이주 전말을 차례로 기록하며 이주한 다음해인 860년 노사나불을 조성하였다고 한 기록도 믿지 않을 수 없다. 비문의 문맥으로 보아 별개의 비로자나불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보림사 전임장사부관 김수종이 헌안왕 2년에 발원하여 이 철불 주조불사를 시작한 것을 후임 장사부수인 김언경이 헌안왕 4년에 마무리했는데, 김언경이 자기의 공을 과시하기 위해 고의로 비문에는 김수종이 주성한 내용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도금술에 의해 이 양각 명문이 숨겨져 당시로는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김언경은 이런 명문이 새겨진 줄 모르고 자신이 공덕을 독차지하려 해서 이런 개작을 시도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 근거로 <보조선사창성탑비>의 전반부 6행은 昆湄縣(영암군)令 金薳이 구양순체로 쓰고 제6행 중간부터는 장사부수였던 김언경이 저수량체로 쓰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비문을 두 사람이 나누어 쓴 예는 거의 없다. 특히 철조비로자나불의 주조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김언경의 글씨로 씌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불상 팔뚝의 명문대로 헌안왕 2년(858) 장사부관 김수종이 발원하여 헌안왕 명으로 주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 불상 명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盧舍那佛’을 조성했다고 했다. 노사나불 곧 비로자나불(Vairocana)은 화엄종에서 추구하는 이상을 상징하며, 선종사찰의 주불이다. <화엄경> 초기 번역본인 <60화엄경>에는 노사나불, 후기 번역본인 <80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불이라 번역하였다. 밀교에서는 마하비로자나불(大日如來)이라 한다. 보림사 비로자나불은 밀교의 마하비로자나불이 아닌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란 뜻이다.

    ② 신라하대에는 사치를 경계하여 절을 창건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금지하고 중수만 허락했다. 흥덕왕 9년(834)에 반포된 교서에 따르면 신분에 따라 服色과 車騎 등을 규제했는데 진골의 옷과 수레의 장식에 금, 은, 옥의 사용을 제한하였다. 육두품 이하의 평민들에게는 놋쇠, 철 등을 주로 사용하게 했다.

    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고 불상을 조성했다는 조성 명문으로 보아 불상 조성에도 국가적인 규제가 있었던 것 같다.

     

    ※ 9C 신라하대는 호족이 발흥하는 시기로 문화의 중심이 중앙(경주)에서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 문화변동의 상징적 유물은 호족의 이미지를 닮은 철불의 등장과, 대선사의 사리탑인 부도와 부도비의 유행이다. 거기에 또 하나 삼층석탑과 석등의 장식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보림사는 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된 사찰이고, 철조비로자나불, 보조선사의 부도 및 부도비, 그리고 쌍탑과 석등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다가 보존 상태도 매우 좋아 이런 문화변동의 양상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 유물들은 모두 조성 연대를 분명이 알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어서 9C 불교미술의 한 기준이 된다.

    신라의 많은 장인들은 800년을 전후하여 지방으로 확산된다. 이로 인하여 중앙양식이 전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의 호족이 성장하는 정치적 변화와, 선종의 성립에 기인한 것이다.

    선종은 어떤 종파에 의지하지 않고 보편적인 법을 구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 사람들은 여래를 위한 탑보다는 고승을 위한 탑을 조성하는데 더욱 정성을 들였으며, 어느 특정 여래를 조성하기보다는 보편적인 법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 9C에 들어 신라 전역에서 널리 일어난 이러한 현상은 고려왕조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이런 과정에 승탑인 부도와 비로자나불이 활발하게 조성된다. 이 두 장르는 8C 절정을 바탕으로 9C에 이르러 화려하게 전국에서 꽃피운다. 승려들과 지방호족, 지배계급과 민중들은 선사들을 중심으로 모여들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서 화려하게 꽃핀 것이 부도와 탑비이다.

    신라시대에는 역대 왕들에게 모두 비석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태종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흥덕왕 등에만 세웠다. 예외로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 원효 서당화상에 세워졌다. 귀부와 이수가 갖추어진 비를 세운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9C 중엽 선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왕에게도 세우지 않은 비를 선사들에게 세웠으며, 그것도 왕의 비석보다 더 장엄하게 만들어 세웠다.

    선종은 일정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선종은 여래 중심이 아니라 선사 중심이어서 개별성이 강하다. 즉 각자의 선사를 중심으로 선문이 형성되듯 각지의 장인의 취향에 따라 미술양식이 성립하게 된다.

    종래에는 중앙집권적 성향이 강하여 중앙에서 어느 형식이나 양식이 완성되면 그것이 오래 계속 모방되어 조성되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길을 자기 방식대로 찾듯 자유롭게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탑과 탑비에서 다양한 형식과 양식으로 창조의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900년을 전후로 입당구법 승려들은 신라와 고려 왕조에 걸쳐 활약한 사람들로 지방 호족들과 함께 신라와 고려의 문화적 연속성의 주체가 되었다.

    고려는 신라하대 문화를 계승하는 가운데 불상과 탑은 신라 하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되 뚜렷하게 정형을 깨고 개별화한다. 장인들은 제작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하기 시작하여 개인양식에 따른 지역양식이 성립한다. 신라의 경우는 중앙집권적인 구조에 따라 완성된 한 양식이 계속 반복하여 조성되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 양식의 반복이다.

    고려 시대에는 그러한 양상이 없어지고 지역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조형활동이 이루어졌다.

     

    * 보림사 쌍탑(석등을 포함해서 국보 제44호)

    남향한 대적광전 앞에 동서로 석탑 2기가 서 있고,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두 탑 사이에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이 두 탑과 석등은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쌍탑과 석등은 상륜부가 완전하여 우리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한 기준이 되고 있다. 9C 전형적인 양식으로 지붕돌의 곡선이 과장되고 연꽃무늬의 새김이 매우 장식적이다.

    동탑의 높이는 5.9m, 서탑은 5.4m이며 두 탑의 구조는 같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상하 두 단의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이 올려져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동탑은 5개, 서탑은 3개), 보개가 다 갖추어져 있고, 수연과 찰주와 거기에 꽂히는 용차와 보주는 없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모서리기둥과 두 개의 버팀기둥이 새겨져 있지만,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버팀기둥이 한 개로 줄었다. 상층기단 덮개돌 윗면의 굄대 두 단 가운데 한 단이 둥글게 변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는데 각층 몸돌에 비해 모서리기둥의 폭이 가늘다. 2, 3층 몸돌의 모서리기둥은 1층에 비해 훨씬 간략화 되어있다. 몸돌 윗면에는 각이 진 2단괴임이 새겨져 있지만 높이는 전형양식에 비해 낮아지고 간략화 되었다.

    지붕돌은 얇은데 모서리는 많이 들려있어 전체적으로 纖弱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의 아랫면의 받침은 5단으로 신라 전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1933년 도굴꾼들이 이 탑의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실패하고 탑을 무너뜨렸다. 다음해 탑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1층몸돌 사리공에서 납석으로 된 舍利壺, 백자 접시, 청동합, 탑지 등이 나왔다. 동탑에서는 납작한 납석판 양면에 글씨가 새겨진 塔誌, 서탑에서는 주사위 모양의 육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진 塔誌가 나왔다.

    두 탑지에 탑의 건조와 보수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咸通 11년 곧 경문왕 10년(870) 庚寅 5월에 凝王(경문왕)이 憲王(헌안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이 탑을 세웠는데, 西原部(지금의 청주) 小尹으로 가 있는 柰末 김수종이 칙명을 받들어 이를 건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이가 바로 장사부수로 있으면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한 그 김수종이다. 서원부에 가 있으면서도 다시 탑을 세운 것이다.

    그후 진성여왕 5년(891) 11월 왕명으로 內宮 소장 사리 7매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조선 성종 9년(1478)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서있던 모양이다. 이해 4월 17일 3백여 명의 대중이 하안거 結制法會를 베풀면서 탑이 기운 것을 보고 중수한다. 중종 30년(1535)에도, 숙종 30년(1684) 중수한 기록이 있다.

     

    * 보림사석등은 현재까지 알려진 석등 중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신라 전형 양식의 석등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장식성이 가장 많다. 높이는 3.12m이며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아담한 인상을 준다.

     

     

    네모난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상면에 1단의 地覆石 받침을 돋을새김하고 그 위에 높은 지복석을 올렸다. 지복석 위에는 8각 평면의 기대받침 3단을 새겼다. 그 위에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지붕돌, 상륜부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팔각하대하석[基臺石]의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하대하석이 그 위에 놓인 연화하대석인 복련대의 직경보다 작다. 이 하대하석 위에 별석의 연화하대석을 올렸는데, 연꽃잎 8장이 엎어 새겨져 있고, 꽃잎 끝은 위로 말려 작은 귀꽃을 이루었다. 이런 귀꽃은 전형양식에서는 봉화의 축서사 석등, 부석사 석등(국보 제17호)의 예가 있다.

    간주석은 비교적 짧은 편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다. 하대 부분이 길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짧게 한 것이다. 간주석의 각 면은 살짝 안으로 들여 깎여있다. 상대석은 아래쪽에 3단의 굄을 두었고, 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 장식을 한 8엽 단판 연꽃잎을 새겼다. 상면에는 1단의 화사석 받침을 높게 마련하고 화사석을 끼울 수 있도록 윗면이 파여있다. 이런 양식은 경주시 원원사지 석등, 경남 합천의 백암리 석등,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등의 예가 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전후좌우 4면에는 거의 전면을 차지하는 화창이 뚫려 있는데, 화창을 두른 얕은 턱에 작은 구멍이 빙 돌아 뚫려있다.

    넓은 지붕돌 여덟 모서리를 돌아가며 자그마한 귀꽃이 있으며, 윗부분에 복련이 새겨져 있다. 처마 끝에 턱을 한단 두어 지붕돌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그곳에서 끊어지게 되어있다. 지붕돌 윗면에는 둥근 상륜받침이 두 단 있으며 그 주변이 8장의 단판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아래위에 연꽃받침이 있는 둥근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작은 지붕돌 모양의 보개가 있으며 맨 꼭대기에 앙련으로 받쳐진 화염보주가 있다.

    탑지에 따르면 868년부터 87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 이밖에도 보림사에는 1997년 6월 문화체육부에서 지정한 <월인석보> 권 25(보물 제 745-9호), <금강반야바라밀경> 권1(보물 제1251호),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보물 제1252호) 등 모두 두점의 국보와 여덟 점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앞 괘불대는 쌍탑 앞에 탑보다 더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괘불대는 전각 앞에 전각과 가장 가까이 자리잡고, 그 다음에 석등, 그 다음에 탑이 벌여 선다. 그런데 이 석등은 두 탑 사이에 있고 괘불대는 다시 그 밖으로 밀려나 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무슨 까닭으로 원위치가 교란된 듯하다.

     

    4.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에 이르는 남북 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동쪽에 대웅전이 있다. 보림사의 주공간은 대적광전과 그 앞마당의 두 탑과 석등이다. 대웅전 쪽 영역은 후대 필요에 따라 증축하였을 것이다.

     

    * 대웅전

    원래 있던 대웅전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는데, 국보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협시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내부는 모두 틔어있고, 가운데 석가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탑지>에 成化 14년(1478)에 탑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보림사사적기>가 天順 연간(1457~1464)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본디의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중층 불전은 마곡사 대웅보전, 법주사 대웅보전, 화엄사 각황전, 무량사 극락전 등이 있다. 중층 법당은 전라 ․ 충청 지방의 옛 백제 땅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 건축의 한 특징으로 생각된다.

     

     

     

    5. 절 경내 동남쪽 산자락에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가 있다.

     

    * 寶林寺 普照禪師彰聖塔(보물 제157호)은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이다.

    높직한 팔각 지대석 윗면에 얕은 굄을 한단 새기고 그 위에 상 · 중 · 하대석과 몸돌, 지붕돌, 상륜부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기단부는 상 · 중 ·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석은 다시 상 · 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은 원래 모두 8각이겠지만 파손이 심하여 윤곽을 분명히 알 수 없다. 누군가가 돌의 결을 따라 조각상을 떼어낸 것 같다. 남은 부분으로 보면 하단에는 각 면에 안상이, 상단에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기 위해 굄을 따로 만들어 넣었는데, 둥근 형태에 측면에 구름무늬를 둥실둥실 새겨 넣었다. 이 굄돌 윗면에 다시 8각 굄이 3단이 있다.

    팔각 중대석은 배가 약간 부른 모습으로 배흘림을 표현하였다. 각 면에는 네모에 가까운 특이한 안상을 두 겹으로 새겼다. 안상 아래위로는 두 줄씩 띠를 돌렸는데, 그 띠를 따라 팔각의 모서리와 중간에 자그마한 꽃무늬가 하나씩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따로 만든 8각 연화대인데 측면의 앙련대와 상단의 8각 덮개돌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앙련은 모서리마다 단옆 1판 연꽃잎을 새기고, 꽃잎 윗면에는 고사리무늬와 곡선무늬로 장식하였다. 몸돌 굄대는 팔각으로 높직한데 중간에 가느다란 가로선이 한 줄 돋아있다. 이 몸돌 굄대도 가운데가 약간 볼록하다.

    몸돌은 유난히 크고 넓다. 8각의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이 새겨졌고, 윗부분에는 기둥머리가 새겨져 목조건물의 짜임을 본뜨고 있다. 몸돌 8면의 앞뒤에는 문이,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문안에는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가 새겨져 있는데, 자물쇠에 도깨비 얼굴이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다. 문고리는 동그랗지 않고 가운데가 잘록한 오뚝이 모양이다. 문 위쪽에도 꽃무늬 장식이 있다. 사천왕상은 화려한 갑주를 입었는데, 굽이쳐 휘날리는 옷자락과 매듭 등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다.

    지붕돌은 둔중하다. 낙수면은 급하게 흘러내리며 팔각 지붕돌이 만나는 곳에는 굵직한 마루가 표현되었으며 그 사이에 기왓골이 새져졌다. 아래쪽에는 팔각받침 두 단과 서까래가 새겨졌고, 처마에는 굵은 구름무늬가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두툼하며 막새기와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모서리마다 귀꽃이 있다. 지붕돌 윗면에는 상륜을 받치기 위한 팔각 굄이 두 단 있다.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치레로 놓여있다. 복발은 둥글며 옆의 여덟 모서리를 따라 꽃무늬가 있고 이 무늬들을 연결하는 가로 띠가 있다. 그 위에 마디가 있는 간주가 세워졌고 그 중간 마디에 구름무늬를 장식한 보륜이 얹혀 있다. 보주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작은 앙련대 위에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9C 팔각원당형부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크기도 당당하고 장식문양도 정교하다. 비문에 의하여 헌강왕 10년(884)경에 건조되었다.

     

     

     

    *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

    普照禪師 체징의 탑비로 그가 입적한 뒤 4년만인 884년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9C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의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비는 비신 · 귀부 ·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碑題가 적혀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무늬를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는 蟠龍을 대칭으로 조각하였다. 높이 3.46m이다.

    비문은 定邊府司馬 金潁이 지었다. 비문의 글씨는 무슨 사연인지 첫 행부터 7행 중간 ‘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에는 金彦卿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

    이 탑비는 경문왕 8년(868)에 세운 澈鑑禪師 道允(798~868) 탑비를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도의선사의 행적은 <보조선사창성탑비>, 문경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적조탑비> 그리고 925년에 편찬된 <祖堂集> 17권 雪嶽山陳田寺元寂禪師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도의선사의 전기를 복원할 수 있다.

    도의선사는 속성이 왕씨로 北漢郡(지금의 서울 부근)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법명을 明寂이라 하였다.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가서 오대산을 참배하고, 寶壇寺로 가서 구족계를 받는다. 그리고 조계산 보림사로 가서 육조영당을 참배하고 江西 洪州 開元寺에서 제9조 西堂 智藏(739~814)에게 인가를 받는다. 여기서 도의라는 이름을 새로 얻는다. 서당지장은 육조 혜능의 법증손이며 제8조인 馬祖 道一(709~788)의 제자이다. 이어 師叔인 百丈 懷海선사(720~814)에게서도 인가를 받는다. 백장선사는 그 스승인 馬祖 道一선사의 선맥이 모두 동국 승려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한다.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익힌 선은 남종선이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중국 선종은 제6조 혜능부터 남북으로 갈라진다. 선에 대한 관념과 수행 방법도 시대에 따라 발전한다. 처음 인도에서는 여래선이라 하여 선정에 드는 것이었다. 달마대사는 “安心面壁” 곧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구했다. 그러다가 혜능에 와서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成佛”(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고 했다. 마조 도일에 이르면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이다. 마조 도일의 문파를 특히 그가 있던 지명을 따 洪州宗이라 한다.

    도의선사는 무려 35년 동안 유학하고 헌덕왕 원년(821)에 귀국하여 선의 뜻을 전파하려 한다. 그러나 당시 통일신라사회의 지배 이념은 王卽佛의 왕권불교였다. 왕은 부처, 귀족은 보살, 대중은 중생으로 붓다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사회구성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이렇게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어 있었다. 경전을 해석하고 염불이나 외는 일보다 인간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도의선사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부르짖는 혁명사상이었다. 도의선사는 서라벌에 와서 그 왕권불교의 질서와 논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가르침을 마귀의 외침이라 배척했다. 그리하여 양양 설악산 진전사에 들어가 40년 동안 선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다가 廉居화상에게 법을 전해주고 열반에 든다.

    도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염거화상(?~884)은 설악산 億聖寺(선림원)에 주석하며 선을 펴지만 아직 선문을 개설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는 못한 듯하다.

     

    ※ 普照禪師 體澄(804~880)

    보조선사창성탑비에 보조선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조선사는 애장왕 5년(804)에 웅진(공주)에서 태어났다. 성은 김씨이며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어린 나이에 花山 勸法師에게 출가했다. 24세 때인 흥덕왕 2년(827) 加良峽山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설산(설악산) 億聖寺(선림원) 염거화상(?~884)의 문하에서 법인을 받았다. 10년 공부를 한 후 희강왕 2년(837) 34세로 貞陸, 虛會 등 도반들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스승인 도의선사와 같이 중국 선종의 인가를 받아오기 위함이었다.

    그는 당나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선지식을 찾았지만 염거화상을 통해 전해받은 도의선사의 법밖에 다른 법이 없음을 깨닫고 3년 만인 문성왕 1년(840)에 신라로 돌아왔다. 平虜使를 따라 귀국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청해진대사 장보고(?~846) 세력의 인도로 전라남도 해안을 따라 영암이나 나주를 거쳐 돌아왔을 것이다.

    그후 20여 년 동안 진전사(도의선사), 억성사(염거화상), 자신이 출가한 절과 수계를 받은 절이 있는 고향 태안반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청양 장곡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56세 때인 헌안왕 3년(859) 武州(지금의 광주)의 黃壑蘭若로 옮긴다. 혁신적인 사상인 선종을 펼치기에는 보수적인 경주 쪽 보다는 진취적인 남방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때는 장보고가 살해된(846) 지 얼마 안되는 시기였다. 이로인해 무주 일대의 민심은 신라조정에서 더욱 멀어졌을 것이다. 또 장보고 세력은 해상 세력이므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유학승과 특히 선사들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을 감안하면 체징이 무주로 옮긴 것도 그런 연유였을 것이다.

    보조선사가 이곳으로 옮겨오자 신라 조정에서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조정에서는 859년 長沙縣 副守 金彦卿을 보내 체징을 王京으로 초빙하려 한다. 그러나 선사는 병을 핑계하여 정중하게 거절한다. 왕은 10월에 다시 영암군 僧正 連訓법사와 奉宸 馮瑄 등을 보내 가지산사로 옮길 것을 청한다.

    보조선사가 이곳 가지산사로 옮겨오자 다음해인 헌안왕 4년(860) 봄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녹봉을 떼내고 사재를 털어 무쇠 2천 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성하여 사찰을 장엄하려 한다. 이에 국왕은 望水里 南等宅에 교지를 내려 금 160分을 공출하게 하고 租 이천 斛을 내려 이를 돕게했다. 다음해에는 절을 넓히는 불사를 일으켜 가지산문의 종찰로서의 규모를 완비한다. 보조선사는 이곳에서 20년을 주석하면서 初祖 도의선사, 제2조 염거화상으로 전해오는 자가의 禪門宗旨를 펴 구산선문의 효시인 가지산문을 개창한다. 오늘날에도 그 맥이 전해지는 가지산문의 본가이며,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에 이어 보조선사를 3조로 삼는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보조선사 체징은 헌강왕 6년(880) 6월 30일 77세로 열반에 든다. 3년 뒤인 883년 제자 義草 등이 行狀을 지어 올리며 탑과 비를 세울 것을 조정에 청하니 국왕은 스님의 시호를 普照禪師, 탑호를 彰聖塔이라 내리고 金潁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절 이름을 보림사라 내려주어 우리나라 선종의 총본산임을 인정한다.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가 중국 선종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6. 절 들어가기 전 동남쪽(오른쪽) 보림사 밑에 있는 마을 뒤 숲에 부도 6기가 있다. 그중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을 동부도라 한다.

     

    * 보림사 동부도(보물 제155호)는 매우 넓은 지대석 위에 면마다 안상을 새긴 높직한 팔각 단 위에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은 둥근 모양에 연꽃잎 여덟 장이 엎어 새겨져 있다. 연꽃잎은 끝마다 귀꽃이 있는데, 튀어나오지 않고 납작하게 붙어있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8각 기둥 모양이며, 표면에 꾸밈이 없다. 귀꽃만 없을 뿐 하대석과 거의 같은 모양으로 큼직한 앙련 8장으로 감싸여 있고 아래쪽에 낮은 받침 3단, 위쪽에는 높직한 몸돌받침 두 단이 있다.

    몸돌도 8각 기둥모양인데 모서리기둥은 없고 한 면에 문과 자물쇠가 얕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좁고 얕은 편이며, 아래쪽 몸돌과 닫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에는 넓은 낙수홈이 파여있다. 지붕돌 윗면에는 지붕마루 8개가 굵고 높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륜부는 중간에 테가 하나 낀 간석이 놓였고, 그 위에 작은 지붕돌 모양의 보개, 또 그 위에 보륜이 있으며 맨 위의 보주는 밖으로 뒤집힌 2중 연판으로 받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서 몸체가 가늘어 보인다. 이 부도는 형태와 구조가 깔끔하고 세련되어 있으나 조각수법은 입체감이 없고 섬약하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부도 형식을 이어받으면서도 고려의 특징도 가미되어 있다. 보림사에 있는 여러 부도 중 고려시대의 석조부도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전체 높이는 3.6m이다.

     

     

    이밖에 조선 후기 부도 여러 기가 있다. 그 중에는 중대석에 다람쥐가 표현된 것도 있는데, 왕릉 망주석에 표현되던 비운문이 다람쥐 형태로 바뀌는 것은 인조 이후의 일이다. 

     

    7. 절에서 서북쪽으로 2km쯤 가면 유치초등학교 보림분교가 나온다. 여기서 서북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민가 몇 채가 있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 부도 2기가 있는데, 두 부도 사이에 집 한 채가 끼어있다. 집 앞 남쪽 것은 서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어서 (서부도)서부도라 하고, 집 뒤 북쪽에 있는 것은 조금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서부도)동부도라 한다. 이 두기를 합쳐 보물 제156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보림사 서부도(보물 제156호)의 서부도는 방형 지대석 위에 이색적인 8엽복련석이 놓였는데 그 형식은 고려시대 많이 이용되었던 如意頭紋과 비슷하다. 복련 밑에는 높은 3단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角진 띠 한단이 있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 모서리에 連珠形의 우주를 세웠다. 각 면은 안으로 4曲이 있는 원형의 안상이 있다. 상대석에는 단판 8엽의 앙련이 있는데 판 안에는 타원형 윤곽 속에 4花形이 첨가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탑신받침 1단이 있다.

    8각의 몸돌은 앞면에 문짝과 자물쇠, 그 밑에 문고리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높고 좁은 8각으로 되어있는데, 아랫면에 1단의 받침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추녀 밑은 직선이며, 윗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다. 隅棟을 따라 내려와 전각에서 반전이 있을 뿐 귀꽃은 없다.

    상륜부에는 매우 낮은 扁球形의 복발이 있는데 그 밑에 雲紋이 있다. 그 위에 각각 연잎에 덮인 보주와 앙련에 싸인 작은 보주가 중첩되어 있다.

    형태는 아름다우나 조식수법이 섬약하고 장식성이 지나친 편이다.

     

    서부도의 동부도는 하대석 판의 가장자리에 연판이 붙은 平板적 귀꽃이 있고 밑에는 얕은 면을 돌려 8각 각 면에 안상 2좌씩을 두었다. 몸돌 1면에는 문짝과 자물쇠를 새겼다. 지붕돌 추녀는 대부분 파손되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1段의 副椽이 있다. 상륜부는 일부 손상을 입었으나 거의 완전한 편으로 반전이 심한 보개와 보륜, 보주가 있다.

    단정한 비례와 규칙성 있는 결구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를 하한으로 보고있다.

    1941년 사리장치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무너뜨린 것을 1944년 재건하였다. 높이는 3m이다.

     

     

     

    ※ 구산선문

    신라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고 있던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들은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萬法歸一)”는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통일왕국의 주도 이념으로 삼아 화엄불국토 건설을 실현하고자 한다. 화엄불국사의 조영은 이 꿈의 실현을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8C 후반 제35대 景德王(742~765 재위) 대를 정점으로 통일왕조는 왕실의 내분과 지배층의 부패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계속되는 왕족간의 왕위 다툼으로 지방에서는 독자적 경제기반을 가진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로 말미암아 절대화되어 있던 진골왕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들의 이념적 바탕인 화엄사상도 더 이상 주도 이념의 구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새 사회를 이룰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不立文字 直指人心’이라는 종지를 내건 달마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중국 선종의 초조 菩提達磨(?~528)는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전했다. 달마의 법맥은 5조 弘忍(601~674)까지는 한 갈래로 이어오다가, 6조 慧能(638~713)에 이르러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진다. 神樹대사(606~706)를 초조로 하는 북종선은 漸修를 주장하며 皇室의 비호를 받으며 북방지역으로 전파되었다. 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은 남종선의 초조이자 6조로 인가받은 혜능이 주석하던 廣東省 韶州 曹溪山 보림사를 중심으로 남중국 전역으로 퍼진다.

    신라 사회는 여전히 골품제도를 바탕으로 한 신분사회였다. 아무리 뛰어나도 육두품 이하 하층귀족층 출신들은 최고 집권층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신분상의 제약을 받던 육두품 이하의 하층 귀족계급 출신 승려들이 대거 당나라로 건너가서 신사상을 체득하고 돌아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혁신적인 남종선을 배워 당나라의 선문 조사의 印可를 받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인가를 받은 선사는 一門을 개설하여 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9C 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한 구산선문은 이렇게 우리나라 선사들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당나라의 선문 조사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설립한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남종선의 心印을 받고 돌아온 사람은 도의선사였다. 도의선사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화상(?~844)에게 법을 전한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億聖寺(선림원)에 주석하면서 보조선사 체징(804~880)에게 법을 전해 주었고 체징은 장흥 가지산으로 가서 가지산문을 연다. 이어 8개의 산문이 열린다. 이를 9산선문이라 한다. 이들은 9C 초반부터 10C 초반에 걸쳐 그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모두 개산했다.

     

    9산선문은 가지산문(장흥 보림사-도의), 실상산문(남원 실상사-홍척), 사굴산문(강릉 굴산사-범일), 동리산문(곡성 태안사-혜철), 성주산문(보령 성주사-무염), 사자산문(영월 흥녕사-철감), 희양산문(문경 봉암사-도헌), 봉림산문(창원 봉림사-현욱),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엄) 등이다.

    이 가운데 굴산사, 성주사, 봉림사, 광조사는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있다.

     

    선종의 사회적 성격은 성속의 통일과 계급의 평등이었다. 인도와 중국은 신분제도와 경제수준에 따라 불교의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냈다. 선승들은 사회구조의 이질성이 빚는 마찰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려고 노력하였다. 선승들은 승려와 신도의 차별을 없애고 스스로 일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선종이 주장한 노동관과 평등관은 실천성을 수반하였고, 중생제도에 접근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한편 개인주의, 분파주의로 내닫고 직관을 강조하여 배타적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9C 말 농민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될 때에 선종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농민들은 유격전을 벌이면서 산을 근거지로 삼았다. 결국 선종은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지방 호족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선종은 농민들과 연계성을 갖지 못하고 후원자도 되지 못했다. 이때 선종 사찰과 승려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심정적 동의와는 달리 폭력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파괴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는 농민들을 옹호하기에는 선승들의 이론적 토대가 부족하였고, 현실적인 용기도 없었다. 선종과 선승들은 결국 민중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실천적으로 확립하지 못하고 그 역할을 미륵신앙에 떠넘겼다.

    선종은 사상적 측면이 강한 반면 미륵불을 받드는 것은 신앙 중심이다. 신라 중대에는 정토신앙이 미륵신앙을 크게 앞질렀다. 그러나 하대로 내려오면서 민중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이 정토신앙을 압도하였다.

     

    ※ 참고한 책

    강우방, 미의 순례, 예경, 1993.

    강우방,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열화당, 1999.

    강우방, 원융과 조화, 열화당, 1990.

    강우방, 곽동석, 민병찬, 불교조각Ⅰ․Ⅱ,솔, 2003.

    강우방, 신용철, , 솔, 2003.

    김영태, 한국불교사개론, 경서워, 1988.

    동화 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제 5권, 불상, 1973.

    문명대, 원음과 고전미, 예경, 2003.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 비평사, 1993.

    李政, 韓國佛敎寺刹事典, 불교시대사, 1996.

    출처 : 無碍洞天 세상과 사람
    글쓴이 : 무애동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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