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스크랩] 정남진 장흥 보림사
    살아있는역사 2014. 2. 6. 10:38

     

     

    정남진 장흥 보림사

     가지산 전망대에서 잡아본 보림사 전경

     

    위    치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관 리 자 : 보림사
    전화번호 : 061-864-2055
    홈페이지 :  travel.jangheung.go.kr 
    개    요 :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지금부터  1천 3백여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이곳에 처음절을 지은 것은 보조국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
               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지산사였다. 그 뒤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에서 헌안왕의 뜻을 받아 신
               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열었다. 880년 체징이 입적할 때에 무려 800여명의 제자
               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입적 후에 헌강왕이 절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다. 화엄종 사찰로 출발해 선종사찰로 바뀐 것이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초 세조 3년
               (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
               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적혀있다.
    
    ▷ 보림사 창건설화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
               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마리
               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
               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
               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
               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
               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보림의 하나라고 한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
               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
               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
               며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20여
               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 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보림사에서 처음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
               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년)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
               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보통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
               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
               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
               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쌍탑과 
               석등을 앞 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원형대로 복원 (52평)되었으며, 외호
               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
               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칸, 측면4칸
               의 팔작지붕집으로 겉 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그 뒤 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비가 있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비와 부분 손상
               된 부도는 모두 보조선사 입적 후 세워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절 앞마을 뒤
               잡목 숲 안에 있는 동부도와 절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서부도들이 선종 대
               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
               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 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도로안내 : 나주 영암방면에서 23번 국도 따라 장흥으로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유치면 송정리. 
               송정리 바로 못미쳐(왼쪽에 유치중학교 지난다) 왼쪽에 보림사 가는 5번 군도로가 나있다. 
               이 길을 따라 2.5km가면 왼쪽에 용소산장이 나오고, 그 앞에 두 갈래길 중 왼쪽길을  따라
               1.5km 가면 보림사이다.
    주변관광지 : 강성서원, 유치자연휴양림, 옥련암
    정보제공 : 보림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봉덕리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860년(헌안왕 4)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초암을 확대해 지은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였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으로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으로 일컬어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대사찰이 되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3층석탑·석등·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보조선사창성탑비·동부도·서부도·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 다수의 유물이 전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858), 국보 제117호, 전남 ...
     
    보림사에 있는 858년명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철불좌상. 국보 제117호. 높이 273㎝.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상(865)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명문이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왼쪽 팔 뒤에 조상기(造像記)가 음각되어 있는데 "대중 12년 무주장사 부관 김수종(武州長沙副官金遂宗)이 왕에게 불상 만들기를 청했다"는 내용이다. 보조선사창성탑비문에도 이 불상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선제(宣帝) 14년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로서 시철(市鐵) 2,500근을 내어 노자나불(盧舍那佛)을 조성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두 기록으로 보아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인물이며, 지권인(智拳印)의 철불 존명(尊名)이 노자나불임을 알 수 있어 신라 하대 신앙사연구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불상이다. 이 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에 비해 인체의 비례가 맞지 않는데 몸에 비해 머리는 큰 편이고, 지권인을 결하고 있는 손은 지나치게 작은 반면에 발은 지나치게 크게 조각되어 있다. 얼굴은 경직된 인상으로 약간 치켜올라간 긴 눈과 각이 진 코, 두툼한 입술 등 표현이 강하다. 목에는 삼도가 두텁게 늘어져 비만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어깨는 빈약한 것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 통견의 법의는 앞가슴이 V자형으로 깊게 벌어지고 속에 수평으로 입은 내의가 보인다. 옷주름은 평행융기선으로 정제되어 있지 않으나 비교적 유연한 편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양식을 살피는 데 있어서 조각 수법은 우수하지 못하지만 연대를 수반한 중요한 작품이다.

     

     

     

    보림사3층석탑
    보림사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
     
    보림사의 법당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국보 제44호. 높이 남탑 540㎝, 북탑 590㎝.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규모와 양식이 거의 동일하다. 두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중석·갑석을 붙여 4매의 돌로 하층기단을 형성했는데 하대석 윗면에는 얕은 굄이 있으며 중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갑석 윗면에는 얕은 굄이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 각 면에도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얕은 갑석 밑에는 부연(附椽), 위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넓은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이며, 낙수면 전각(轉角)의 반전이 큰 편이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로 이루어졌는데 보륜에서 남탑은 3륜(輪), 북탑은 5륜(輪)인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양식으로 완형(完形)이 보존되어 있는 드문 예이다. 1934년 해체된 것을 보수할 때 사리장엄구와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부도. 보물 제155호. 높이 360㎝.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지대석 위에 있는 8각의 하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위에는 반구형(半球形)으로 8엽의 복련(伏蓮)이 덮여 있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8각기둥으로 표면에 장식이 없다. 상대석은 귀꽃이 없을 뿐 하대석과 같이 8엽의 앙련(仰蓮)이 돌려져 있다. 탑신도 8각의 석주형(石柱形)인데 한 면에 문비(門扉)와 자물쇠형이 얕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밑의 부재들에 비해 좁고 낮은 편으로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받침이 있다. 추녀는 수평이며 옥개석 윗면에는 8조의 굵고 높은 우동형(隅棟形)이 조각되어 있고 끝에 꽃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 위에는 간석(竿石)이 있고 그 위의 우동 끝에 귀꽃이 표현된 보개·보륜·보주가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각 부재의 너비가 좁고 높아 고준(高峻)해보이며 장식이 평판적이고 섬약해 입체감은 적으나 세련된 형태이다.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과 탑비
    보림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보물 제157호, ...
     
    보림사에 있는 가지산문의 개산조(開山祖) 보조체징의 묘탑과 석비. 보물 제157호와 보물 제158호. 높이 410㎝와 350㎝.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가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높게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좁고 길쭉한 구조를 보인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파손이 심해 조각을 알아보기 어려우며 상단에 사자를 조각한 흔적이 보인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이 있는데 피어오르는 듯한 구름무늬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중대석은 배흘림 형태이며 안상이 표현되어 있고, 상대석은 양감이 있는 앙련이 조각된 팔각연화대이다. 탑신에는 문비와 사천왕(四天王)이 각 면에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기와지붕을 그대로 모각하고 상륜부에는 복발·보륜·보주가 남아 있다. 탑비는 비문과 귀부·이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언경(金彦卿)이 썼다. 탑비에 의해 보조선사는 804년(애장왕 5)에 태어나 880년(헌강왕 6)에 타계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부도의 제작연대는 880년대로 추정되고 탑비는 884년(헌강왕 10)에 세워졌다. 제작연대가 비교적 분명하므로 통일신라 말기의 석조물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보림사서부도
    보림사 /보림사서부도, 보물 제156호, 전라남도 ...
     
    보림사의 서쪽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2기의 고려시대 석조부도. 보물 제156호. 높이 동부도 360㎝, 서부도 300㎝. 모두 8각원당형으로 기본구조는 매우 비슷하지만 세부장식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서부도에는 정4각형의 지대석 위에 변형된 이색적인 8엽의 복련석(伏蓮石)이 있는데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던 여의두무늬[如意頭紋]와 비슷하다. 중대석도 8각으로 각 모서리에 연주무늬[連珠紋]의 우주를 모각하고, 각 면에는 안으로 4곡(曲)이 있는 원형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 안에 4화형(花形)이 첨가된 단판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8각 탑신의 앞면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형이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높고 좁은 8각으로 아랫면에 한 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의 경사가 급하며, 전각에서 반전이 있다. 상륜부에는 매우 낮은 편구형(扁球形)의 복발과 보주가 있다. 형태는 아름다우나 조각수법이 섬약하고 지나친 장식성을 보인다. 동부도는 하대석의 연꽃 끝에 연판이 붙은 평판적인 귀꽃이 있고 밑의 8각면에는 안상 2구씩이 새겨져 있다. 탑신의 앞면에 문비와 자물쇠형을 모각했다. 옥개석의 추녀는 대부분 파손되어 원상태를 알 수 없으며 상륜부는 반전이 심한 보개·보륜·보주로 이루어졌다. 1941년 도굴로 파괴된 것을 1944년 재건했다. 2기의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연한 각부 비례와 규칙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장식성이 강한 점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이 보이며 조성연대가 고려 중기 이전일 것으로 보인다.
     

      

     

     

     

     

     

     

     

     

     

     

     

     

     

     

     

     

     

     

     

     

     

     

     

     

     

     

     

     

     

     

     정남진 오시는길

     
    출처 : 정남진 장흥토요시장
    글쓴이 : 남도 원글보기
    메모 :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