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워지면서 문익점을 생각하다
추석 명절이 있었던 9월 중순만 해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국의 날씨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차가운 대륙 고기압이 유입되면서 30도를 넘나들던 낮 기온이 하루 만에 18도까지 떨어진 것인데, 추운 계절을 향해 빠르게 넘고 있는 가을의 문턱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목화 씨앗 한 톨로 이 땅에 따뜻함을 전한 문익점.
얇은 삼베옷으로 겨울을 나야 했던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옷을 선사하기 위해 그가 시도한 혁신을 따라가 보자.
선비 문익점
1329년 강성현(경남 산청)에서 낙향한 선비의 둘째로 태어난 문익점은 그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대유학자 이곡(李穀)의 문하생이 되었다.
원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던 이곡은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해 80년간 계속된 공녀제(貢女制), 고려의 여인들을 원나라에 보내는 악습을 폐지하도록 한 의로운 선비로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문익점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길임을 익히고 또 익혔다.
그렇게 10년간 학문과 마음을 갈고 닦은 문익점은 20살 때 시경만을 가르치는 국립학당 격인 경덕재에 들어갔고, 23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향시에 급제했다.
그리고 1360년, 문과에 급제해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김해부사록을 시작으로 유교 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 등 주요 벼슬을 거쳐 1363년 서장관(외국에 나가는 사신을 따라 보내던 벼슬)으로 원나라를 가게 됐다.
그런데 이 시기는 공민왕이 실시한 국권회복 정책과 친원파 숙청으로 인해 고려와 원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때로 공민왕이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해결을 시도했지만, 원은 매번 사절단을 억류해버렸다.
파견되면 목숨조차 담보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
하지만 고려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사절단의 명을 받든 문익점은 42일간 구류된 후 원나라의 남방인 교지(운남) 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리고 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억울한 억류 생활에서 벗어나 1363년 귀국길에 오른 문익점의 짐 속에는 특별한 선물이 들어있었다.
따뜻한 씨앗을 이 땅에 심다
스승 이곡의 영향으로 일찍이 원나라 농서인 [농상집요]를 공부한 문익점은 농사일과 옷감 짜는 일에 관심을 두면서 목화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원나라에서 목화를 직접 보면서 고려의 백성들에게 목화로 만든 따스한 옷감을 나눠 주는 것이야 말로 그가 갈 길임을 깨닫게 됐다.
이에 문익점은 목화가 타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원나라의 봉쇄를 뚫고 목화씨 열 톨을 붓자루 속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후 문익점은 농사일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3년간 각고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 한 포기의 목화가 자라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그렇게 재배에 성공한 목화씨는 해마다 늘어 4년 뒤에는 온 동네에 목화씨를 나눠 줄 수 있었지만,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내고 옷감을 짜는 기계가 필요했는데, 마침 정천익의 집을 방문한 중국 승려 홍원의 도움으로 실 뽑는 기계를 만들고 여종의 탁월한 손재주로 목면을 짜서 무명옷을 만들게 되면서 목화 직조의 길은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문익점의 목화씨, 나라를 바꾸다
사실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재배와 목면 생산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산업혁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국부 증진과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다른 분야 생산도구 제작의 단초를 열었다.
또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되었고, 무명은 매매나 교환의 통화 수단으로도 이용되는 동시에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이에 1440년 세종은 1398년 생을 마감한 문익점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하니 목화 씨앗 한 톨로 한국인의 삶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문익점.
그야말로 국가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류 혁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