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남진 장흥 보림사
정남진 장흥 보림사
가지산 전망대에서 잡아본 보림사 전경
위 치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관 리 자 : 보림사 전화번호 : 061-864-2055 홈페이지 : travel.jangheung.go.kr 개 요 :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지금부터 1천 3백여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이곳에 처음절을 지은 것은 보조국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 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지산사였다. 그 뒤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에서 헌안왕의 뜻을 받아 신 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열었다. 880년 체징이 입적할 때에 무려 800여명의 제자 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입적 후에 헌강왕이 절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다. 화엄종 사찰로 출발해 선종사찰로 바뀐 것이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초 세조 3년 (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 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적혀있다. ▷ 보림사 창건설화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 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마리 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 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 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 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 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보림의 하나라고 한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 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 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 며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20여 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 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보림사에서 처음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 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년)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 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보통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 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 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 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쌍탑과 석등을 앞 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원형대로 복원 (52평)되었으며, 외호 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 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칸, 측면4칸 의 팔작지붕집으로 겉 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그 뒤 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비가 있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비와 부분 손상 된 부도는 모두 보조선사 입적 후 세워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절 앞마을 뒤 잡목 숲 안에 있는 동부도와 절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서부도들이 선종 대 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 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 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
도로안내 : 나주 영암방면에서 23번 국도 따라 장흥으로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유치면 송정리. 송정리 바로 못미쳐(왼쪽에 유치중학교 지난다) 왼쪽에 보림사 가는 5번 군도로가 나있다. 이 길을 따라 2.5km가면 왼쪽에 용소산장이 나오고, 그 앞에 두 갈래길 중 왼쪽길을 따라 1.5km 가면 보림사이다. 주변관광지 : 강성서원, 유치자연휴양림, 옥련암 정보제공 : 보림사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봉덕리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860년(헌안왕 4)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초암을 확대해 지은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였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으로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으로 일컬어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대사찰이 되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3층석탑·석등·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보조선사창성탑비·동부도·서부도·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 다수의 유물이 전하고 있다.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부도. 보물 제155호. 높이 360㎝.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지대석 위에 있는 8각의 하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위에는 반구형(半球形)으로 8엽의 복련(伏蓮)이 덮여 있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8각기둥으로 표면에 장식이 없다. 상대석은 귀꽃이 없을 뿐 하대석과 같이 8엽의 앙련(仰蓮)이 돌려져 있다. 탑신도 8각의 석주형(石柱形)인데 한 면에 문비(門扉)와 자물쇠형이 얕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밑의 부재들에 비해 좁고 낮은 편으로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받침이 있다. 추녀는 수평이며 옥개석 윗면에는 8조의 굵고 높은 우동형(隅棟形)이 조각되어 있고 끝에 꽃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 위에는 간석(竿石)이 있고 그 위의 우동 끝에 귀꽃이 표현된 보개·보륜·보주가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각 부재의 너비가 좁고 높아 고준(高峻)해보이며 장식이 평판적이고 섬약해 입체감은 적으나 세련된 형태이다.
정남진 오시는길